시사칼럼

단어 하나에는 단순한 정의 이상의 의미들이 있다. 사람들 사이를 돌고 돌다보면 어감이나 뉘앙스, 새로운 용법들이 덧붙여져 기존의 정의와 전혀 다르게 쓰이기도 한다. 정치적 용어는 더욱 그렇다.

요즘 인터넷부터 신문·방송을 뒤덮고 있는 진보(progress)니, 보수(conservatism)니 하는 단어들도 사전적 의미들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용법으로 사용되고 있다. 애초 ‘변화’라는 뉘앙스를 갖고 있는 진보라는 단어에 비해 ‘정체’로 비춰지는 보수라는 단어는 좀 불리한 면이 있다. 색깔론이 유효한 우리나라에서는 반대의 영향력을 발휘하기도 하지만. 정치적 단어가 담고 있는 의미의 변화는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 자신을 또는 누군가를 진보로 지칭한다면 어떤 가치에서 진보라는 말인가? 성장과 분배? 소수자의 권리? 개발과 보존? 이런 거대 담론을 떠나서 가정과 학교, 직장에서, 자신의 삶의 태도 자체에서 소위 진보적 가치를 옹호하고 급진적으로 쟁취하고 있는가? 이 질문에 쉽게 답할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사회에서 어떤 의미로는 가장 보수적인 세력이 바로 진보세력 내부에 있다. 군사독재와 맞서 싸우며 당시의 사회를 ‘진보’시켰지만, 그 때의 정서, 감수성, 체질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변화하기를 거부하는 이들 말이다. 보수집단이 부도덕으로, 무능력으로 질책을 받고 외형적이나마 부단한 변화를 꾀할 때도 이들은 한 때 우리 사회 진보를 이끌었다는 이유만으로 비판의 칼날을 피해 안으로 안으로 깊숙이 숨어들었다.

보수집단이 그토록 부단히 인터넷을 배우고, 청년 정치인들을 스타로 만들고 서민이미지를 마구 가져가 쓸 때 진보는 얼마나 절박하게 변화하고자 애썼는가. 그 외부에서 자발적으로 생겨난 새로운 진보들이 그토록 변화를 요구할 때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들였는가. 하루에도 몇 개씩 생겨나는 우리사회 새로운 이슈들에 대해 얼마나 심각하게 고민했는가. 여전히 30년 전의 깃발만을 높이 세우고 홀로 고고하게 독야청청하지 않았는가. 이들을 2012년 현재의 시점에서 ‘진보’라 부를 수 있는가.

빨갱이, 친북좌파를 거쳐 새롭게 등장한 종북 논리는 너무나 고전적인 색깔론이니 새삼 언급할 가치도 없다. 그러나 이런 공격과 별개로 진보세력의 구태의연함이 국민들의 인내심을 넘어섰다는 것은 확실하다. 

오랫동안 이들이 지켜온 가치들, 자주·민주·통일 이런 단어들이 오늘날 의미가 없다는 것도 아니다. 다만 현대에 필요한 새로운 가치들도 그 가치만큼이나 중요하며 절대로 하위에 놓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또 그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방법들도 골방에서 수근덕대던 수준을 넘어서 국민들의 요구에 맞게, 시대의 변화에 맞게 다양하고 진취적으로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요즈음 국민들의 지탄을 받고 있는 통합진보당 당권파의 모습은 쇄국정책을 부르짖던 딸깍발이 유생들과 닮았다. 그들이 내세운 가치는 분명 의미 있는 것이었지만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한 좁은 시야와 구시대를 비판없이 옹호한 고리타분함은 이들을 역사에서 도태시켰다.

오늘 진보세력이 보여주고 있는 이 추태는 분명 부끄러운 일이다. 하지만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새로운 시대의 진보, 새로운 세대의 진보를 위해서 말이다. 오늘의 상처를 바탕으로 내일 다가올, ‘진보’의 진보를 기대해 본다.

/ 황재근(전북 문화저널 기자)
 

저작권자 © 부안독립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