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칼럼

전화벨이 울린다. 원고청탁이다. 톤tone으로 미루어 미안한 마음 또렷하다. 급작스런 통보인 만큼 관계자의 목소리가 어디 낭창하겠는가. 한두 번 경험한 일도 아니어서 덤덤히 듣는다.

어찌 보면 땜방인 셈인데, 사전적 의미로 땜방은 머리에 동글게 머리카락이 나지 않는 부분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다른 의미로는 ‘대리, 대체, 대신해서 채우다’라는 의미도 갖고 있다. 느낌상 어딘가 모르게 부족한 듯한 뜻으로, 차선책인 꿩 대신 닭쯤으로 생각해도 무방할 것 같다.

그러나 영화에서 주연보다는 조연의 역할이 더 중요하고 문학에서도 원관념보다는 보조관념이 꿈틀거려야 한다. 주제보다 소재가 더 중요한 것처럼 보일 듯 보이지 않게 드러내지 않는 보조적 행위야말로 주체를 있게 하는 미덕이 아니겠는가. 예수는 인간이라는 주체를 위해 사랑이라는 보조적 역할을 들고 이 땅에 온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삶을 오롯이 사랑땜방에 바치고 십자가를 짊어졌다. 부처도 자비라는 땜방의 역할을 인류에 남기고 스스로 열반에 들었다.

예수나 석가모니 모두 사람을 살리고 만물을 살리는 대주재의 마음으로 이 땅에 왔다. 풀 한 포기에서 사람에 이르기까지 아픈 곳을 어르고, 꺼져가는 등잔의 심지를 끄지 않고 갈대 하나에도 제 몸에 허虛의 이치를 심어 낭창한 삶을 지어주려는 신인일체의 행함.

인간은 합리와 경험만으로 해결될 수 있는 단순한 동물이 아니다. 산업화로 인한 경험과 지적 우월주의로 현대는 인간의 깊이에 무관심한 시대가 되었고 감성은 상실되어 가고 있다.

인간에겐 知적인 것뿐 아니라 情적인 요소가 중요하다. 인생을 깨닫는 데는 두 가지 요소가 있다. 개념사유적인 것과 형상사유적인 것이 그것이다. 意적인 분석과 경험적 사실, 그보다도 더 깊은 것은 근원적 인간의 모습일 수 있는 감성의 세계이다. 논리와 합리적인 것에 치우쳐 인간의 깊이를 잊어버리는 우리에게 문학적 형상사유는 직관으로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19세기, 키에르케고르와 니체, 도스토예프스키 등 많은 철학가와 시인, 예술가들이 인간의 깊이를 찾아 헤맸던 것은 좀 더 새로운 이상세계를 꿈꾼 발로였듯이 이 시대도 그런 사람이 존중 되어져야 하고 자유로운 이상 실현의 몸짓이 보장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이상을 구현 하는, 인간 삶에 대한 깊이를 고민 하는, 문학·문화예술의 행위가 존중되어져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겠다.

필자는 이번 국회의원 선거와 관련 문화예술에 관한 공약에 대하여 유권자 입장에서 토론한 적이 있다. 세 후보 모두 문화예술에 대한 빈약한 콘텐츠에 아쉬움이 컸다. 문학이 터부시되고 문화예술에 대한 무관심이 곧 인간애의 발로인 감성의 물꼬를 막은 것이며 자기 근원을 상실한 것과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감성이 없는 인간은 그저 단순한 동물로 전락하고 말게 된다는 말이다. 한편 문화예술을 가시적 입장으로 접근할 수도 있겠으나, 그것은 근원의 문제는 아니다. 인간이 인간답게 하는 감성의 발로를 고민할 때 정책적 경제적 효과는 부차적으로 얻어지는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지방정치든 중앙정치든 앞으로의 리더는 문학, 문화예술에 관한 기본적 감성이 지극한 사람을 선選해야한다. 그런 사람일수록 이 사회의 필요한 부분에 스스로 땜방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우리도 서로에게 땜방이 되어주는 삶을 기뻐이 할 때 살만한 세상이 되지 않겠는가. 말도 많고 치열했던 선거가 끝났다. 우리 모두 초심으로 돌아가 보듬어주고 채워주자. 땜질할 곳이 있다면 땜방의 역할을 기꺼이 할 수 있는 감성을 돌아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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