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후 부안에 배움의 장 열어 인재 양성병상서 '세례'받아... 본보도 틈틈히 읽어

백산학원 설립자이자 전 이사장인 정진석(86) 옹이 담낭암으로 투병 중에 있다. 서울아산병원에 입원 중인 정옹은 지난 25일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부안성당 문규현 신부를 통해 세례식과 견진성사 등을 마치고 가톨릭 신자로 다시 태어났다.

지난 21일 개성공단을 방문하고 돌아온 문규현 신부는 돌아오자 곧 정옹의 세례를 위해 서울아산병원을 찾았다.

‘바오로’라는 세례명을 받은 정 옹은 “바보라고 그래야 될란가 봐요”라며 해맑게 웃었다. 문 신부는 “어쩌면 우리가 너무 똑똑해서 탈이에요. 계산하지 않는 사람이 바로 바보잖아요. 새 세상을 위해서는 바보가 될 필요도 있을 거 같아요”라고 덕담을 나누며 의식을 진행했다.

그가 뒤늦게 신앙을 갖게 된 배경은 크게 세 가지 이유다. 하나는 평화와 통일을 여는 길을 걸어온 문규현 신부에 대한 존경의 표현이었고, 다른 하나는 진작부터 천주교에 입교한 장녀의 권유 때문이라고 했다. 사상의 자유에 대해 늘 고민해 왔던 그는 무엇보다 가톨릭이 다른 종교에 비해 배타적이지 않고 비교적 자유롭기 때문에 더욱 끌렸다고 했다.

정진석 옹은 일제 수탈이 한창이던 1920년 백산면 임방리에서 가난한 농가의 5남 중 막내로 태어났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할아버지 아래서 컸던 정옹은 서당을 다니면서 한학을 공부하다 상경하여 일본인이 경영하는 양복점과 출판사 등에 취직해 일했다. 독학을 계속하고 있던 그는 서울 선린상업학교에 입학했고 형님들 덕에 형편이 펴자 일본 유학길에 오를 수 있었다.

그가 교토 리쓰메이강 대학전문부 법정학과(야간)에 다니고 있을 당시 청일전쟁이 발발했다. 당시 이광수, 최남선, 김연수를 비롯한 친일지식인들이 일본에서 ‘전선에 출정하라’는 연설을 하는 등 일제의 발악이 하늘을 찌를 때였다. 그러나 그는 ‘일본 제국의 침략전쟁에 우리 조선인이 싸우다 죽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하고 징병과 징용을 피해 신분을 위장하고 무사히 조선으로 돌아왔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미곡창고 회사 지점에서 근무하다 친구의 소개로 전주도청 회계과에 근무하면서 8?15 해방을 맞았다.

해방 후 1949년 배움의 장소가 마땅치 않던 부안에 재단법인 백산학원 및 사립 백산중학교를 설립해 배움의 길을 열었다. 그가 백산학원을 설립하게 된 것은 1948년 남한 단독 정부수립이라는 정치적 배경이 깔려 있다. 당시 부안은 좌익 세력의 영향력이 컸기에 우익 진영은 조옹을 비롯한 몇몇 좌파 진영의 인물들을 대상으로 선거에 참여할 것을 회유했다. 선거에 참여하는 조건으로 당시 신한공사(동양척식회사) 백산 출장소가 폐쇄되자 그 창고를 임차해 중학교를 설립하자는 것이었다고 한다. 유년 시절 배움의 길에 항상 목말라했던 그는 남한 단독선거 뒤 학교를 세워 후세들을 양성하며 보람있게 살아야겠다고 결심했던 것이다.

1966년 백산고등학교가 설립된 뒤 교장을 지냈고, 1989년부터 백산학원 이사장에 취임한 후 몇 해 전 퇴임했다. 그가 교육계에 몸담고 있는 동안 ‘학생이 학교의 주인’이라는 철학으로 백산학원에서는 현재까지 1만5천여명이 넘는 인재를 양성했다.

병상에서도 부안 소식을 챙기기 위해 틈틈이 본보를 읽고 있다는 정옹은 특히 신영복 선생의 ‘고전 함께 읽기’ 지면 강의에 관심을 보였다. 그는 신선생이 옥중에서 면벽명상을 하던 것처럼 자신도 병상에서 명상을 통해 ‘빨치산’ 활동 당시를 회상하곤 한다고 고백했다. 파란만장했던 삶을 되돌아보기 위해 몇 해 전 출간한 ‘옳고 그름을 떠나서’라는 그의 자성록은 사상 문제와 교육 사업 등을 담담하게 되새김질한 책이다.

해방 후 격동기를 거치는 동안 그는 부안에서 민중들의 힘으로 나라를 세우자는 뜻으로 조선공산당 책임비서를 지낸 사회주의운동가 지운 김철수 선생의 동생인 김복수 선생과 함께 부안군 공산주의 청년동맹을 결성했고, 한국전쟁 발발 후 남로당 면당 책임자가 되어 변산으로 입산하는 험로를 걸었다. 당시 남로당은 일반 서민들에게는 널리 퍼져 있었으나 친미정권 수립과 분단, 군사독재정권을 거치며 좌경으로 공격당해 왔고 해방 50년이 넘어서야 진보정당이 국회에 입성하는 등 새롭게 평가를 받고 있다. 지역에서도 정진석 옹을 비롯해 사회주의운동을 펼쳤던 인물에 대한 역사적 평가나 재해석이 이뤄져야 할 시점인 것이다.

세례를 마친 뒤 문규현 신부는 “정선생님이 그동안 부안에 배움의 길을 열어 주셨고 부안주민들에게 희망이 되어 주셨어요. 오늘의 삶을 완성하는 길에 동반자로 함께 하게 되어서 기쁩니다”라고 밝혔다. 1989년 8?15 광복절에 임수경 씨의 손을 잡고 백두에서 분단을 넘었던 문규현 신부. ‘통일’의 기운을 안고 돌아온 문규현 신부에게 정옹은 쇠잔한 기력에도 불구하고 기꺼운 박수로 화답했다. 세례를 끝내고 소원이 무엇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서슴없이 답했다.

“남북이 하나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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