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복의 고전 함께 읽기(중)

신영복의 고전 함께 읽기 두 번째로, 신영복 교수는 공자, 맹자, 묵자 등의 고전을 통해 현대 사회의 제 문제를 해석하고 있습니다. <편집자주>




동양적 사고는 관계론이 기본

동양적 사고는 관계론을 기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주역은 6개의 효로 이루어지는데 이런 괘가 64개 있습니다. 태극(?)이 양의(兩儀)를 낳고 양의가 사상(四象)을 낳고 사상이 8괘(八卦)를 낳습니다. 여러분은 아마 8괘 중에서 태극기에 있는 네 개의 괘는 알고 있을 겁니다. 이 8개를 구성하는 세 개의 음양을 나타내는 부호를 효(爻)라고 합니다. 괘는 ‘걸다’는 뜻입니다. 괘에다가 어떤 의미를 담아놓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효는 세상에는 이러이러한 현상, 순서의 변화가 64가지가 있다는 것이지요. 오랫동안의 경험을 쌓아서 세상에는 이런 형식의 패턴이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런 패턴을 읽는 것이 주역을 가장 온당하게 읽는 것이에요. 효와 괘를 사물 또는 사물의 변화를 담지하는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주역의 독법은 철저하리만큼 과계론적입니다. 효와 그 효가 처한 자리(位)와의 관계, 효와 효의 관계 즉 응(應)과 비(比), 그리고 괘와 괘의 관계 등 ‘관계’가 판단과 해석의 기초가 되고 있습니다. 개별적 존재의 의미는 오히려 부차적일 정도로 매우 왜소합니다. 개별적 존재의 의미와 역할은 그것이 맺고 있는 관계망 속에서 상대적으로 규정되고 사후에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주역을 모른다고 하지만 우리 전통속에 탄탄히 깔려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똑똑한가도 중요하지만 신입사원이나 며느리를 고를 때 다른 사람과 원만하게 인간관계를 가질 것인지 보지요. 나이 많은 사람은 꼭 이걸 봐요. 젊은 사람들은 얼굴이나 각선미나 이쁜 것만 보는데 그건 안돼요. 관계론적인 사고로 봐야 돼요. 긴 시간을 가지고 여러 관점에서 사람을 보는 이런 문화가 우리들 속에 있거든요. 이것이 주역과 같은 겁니다. 관계야말로 우리들의 신뢰이고 삶의 진정한 가치임에도, 우리사회의 탄탄한 구성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관계가 급속히 황폐화되고 있습니다.

인간관계 황폐화되고 있는 오늘의 현실

신은 호흘이라는 신하가 언젠가 왕께서 대전(大殿)에 앉아 계실 때 어떤 사람이 대전 아래로 소를 끌고 지나갔는데 왕께서 그것을 보시고 “그 소를 어디로 끌고 가느냐?”고 물으시자 그 사람은 “흔종(제사에 동물을 바침)에 쓰려고 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런자 왕께서 “그 소를 놓아주어라. 부들부들 떨면서 죄 없이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모습을 나는 차마 보지 못하겠다”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흔종 의식을 폐지할까요?” 그러자 왕께서는 “흔종을 어찌 폐지할 수 있겠느냐. 소 대신 양으로 바꾸어라”고 하셨다는데 그런 일이 정말로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맹자)

오늘의 현실은 인간관계가 황폐화되고 있습니다. 위 구절은 맹자에서 뽑은 것인데요, 이 인용문으로 자본주의에서 인간관계가 왜 황폐화되고 있는지 설명하고 있는 사람은 아직 없을 겁니다. 맹자가 제선왕에게 왕도를 실천할 자질이 있는지 판단하기 위해서 한 질문입니다. 먼저 제선오아의 신하인 호홀한테서 전해들은 이야기를 확인하는 것이지요. 부들부들 떨면서 사지로 끌려가는 소를 차마 볼 수 없어서 양으로 바꾸라고 한 일이 있었는지 확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불인인지심(不認人之心)’이 제선황에게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맹자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핵심적인 것은 동물에 대한 측은함이 아닙니다. 측은함으로 말하자면 소나 양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소를 양으로 바꾼 까닭은 소는 보았고 양은 보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가장 핵심적인 것은 ‘본다’는 사실입니다. 본다는 것은 ‘만난다’는 것입니다. 보고(見), 만나고(友), 서로 안다(知)는 것입니다. 즉 ‘관계’를 의미합니다.

저는 우리 사회의 인간적인 만남이 없기 때문에 관계의 황폐화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차마 못할 짓들이 버젓이 저질러지는 것이 아닌가, 이것이 맹자를 읽는 독법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서울이 복잡하고 인구가 밀집해서 사니까 인간관계나 서로 배려할 틈이 없잖아요라고 말합니다. 그 말도 일부 맞아요. 그러나 우리가 좀더 사회과학적인 눈으로 보자면 도시의 밀집, 이것은 자본주의라는 체제가 만들어 내는 겁니다. 자본주의라는 체제가 사회역사적으로 존재하는 형식이 도시입니다. 인간관계가 황폐화되는 것이 물리적인 밀집에도 이유가 있지만, 더 크게는 얼굴 없는 생산자, 얼굴 없는 소비자가 인간관계의 보편적인 형식이 되고 있는 상품생산사회에서 구해야 할 겁니다. 모르는 사람이 사용해야 하는데 거기다 얼마든지 다른 거 넣을 수 있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우리 사회의 인간적인 관계를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만남이 없는 관계는 엄밀한 의미의 사회가 아닙니다. 사회의 본질은 인간관계가 지속적으로 작동되는 장소, 질서 그것이 사회입니다. 인간관계가 순간적이거나 잠깐만에 끝나는 것은 사회일 수가 없습니다. 인간적인 만남, 신뢰, 애정이 우리가 사는 기쁨이며 이 사회를 공동체로 만들어 가는 원리이기도 한데 급속히 황폐화되고 있어요. 만남이 있는 사회로 만들어 내는 것. 인간관계가 지속적으로 작동하는 사회를 만들어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음으로 논어에 나오는 君子不器(군자불기)를 예로 들겠습니다. ‘군자는 그릇이어서는 안된다’는 뜻이지요. 그릇이라는 것은 단 한 개의 기능을 하는 겁니다. 우리 사회에서 대단히 강조하는 전문성입니다. 공자는 왜 그릇이 되면 안된다고 했느냐. 하나만 잘한다는 것은 노예원리입니다. 단 한 개의 기능인으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노예입니다. 귀족들은 다 해요. 문사철, 시서화 전부 다 해야 돼요. 이것이 인간적인 품성을 높이는 겁니다. 하나만 하는 것은 사람을 쓸모로써 이해를 하는 것이에요. 사람이 쓸모가 있는가 없는가라는 것은 자본이 인간에게 요구하는 대단히 비정한 논리입니다. 인간은 굉장한 여러 가지의 애정과 신뢰와 봉사와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딱 하나의 능력만 인식하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대학에서도 그러지요. 당장 급하다고 그래서 기업에서 원하는 그릇들만 만들어 내면 얼마 후에 신용불량자가 아니라 인간성 불량자를 양성하게 됩니다. 창조성이 전혀 없는 장기적으로 보면 경쟁성이 없는 인간을 양성하게 됩니다. 인간에 대한 우리 사회의 요구가 얼마나 비정한 것인가 깨달아야 합니다.

근대사는 강철의 역사이며 자본주의는 존재론의 사회

자본주의는 존재론의 탑입니다. 君子化而不同 小人同而不化(군자화이부동 소인동이불화). 이 구절은 논어에 나오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이라는 구절입니다. 군자는 화목하고 부화뇌동하지 않는다. 소인은 똑같은데도 불구하고 화목하지 않다. 이것은 공자가 직접 말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후대에 생겨난 것이라 보기도 합니다. 자공이 대단히 부자여서 나중에 제자들이 공자학당을 만들어요. 공자를 춘추시대 최고의 사상가로 만들어 내는 것이 이 제자들이라고 해요. 옛날 공부하신 분은 위대한 학자가 되려면 똑똑한 제자보다는 돈 많이 버는 제자가 나와야 한다고 해요. 실제로 공자가 안한 말일 수 있습니다. 이는 공자학파, 유가학파가 춘추전국시대라는 난세에 대한 시대적 인식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즉, 전쟁방식으로 모든 나라를 병합해 나가는, 수십개의 나라가 나중에 단 한 개 진나라로 통합되는 것인데, 이것이 오늘날의 미국 패권주의로 수렴되고 있는 신자유주의적인 사활적 경쟁시대와 똑같다고 보고 있습니다.

개인적 윤리 선언하고는 관련이 없습니다. 물론 조선시대 유학자들이 그렇게 해석을 했지요. 그러나 우리는 ‘화이부동’이 나왔던 시대적 배경과 관련하여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렇게 해석합니다. ‘화’라는 것은 자기와 다른 것, 다양성을 그대로 인정하는 공존의 원리입니다. 반대로 자기와 다른 것을 용납하지 않고 흡수 합병 동화해야 하는 것, 그래서 자기 존재성을 키우는 것, 이것이 ‘동’입니다. 공자학파의 모델이 주나라거든요. 주공에 대한 공자의 일념이 있잖아요. 주나라가 제후국들의 평화로운 공존질서였거든요. 이것이 깨지면서 전국시대로 갔거든요. 모든 국가들이 강한 나라든 약한 나라든 또는 추구하는 바가 다른 나라든 다 수용하는 것이 ‘화’이고, 자기 방식으로 지배하는 것이 ‘동’이지요. ‘화’가 관계론이라면 ‘동’이 존재론적인 논리라 보는 겁니다. 이 점이 우리가 관계론을 통해서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일 수도 있고, 오늘날의 이러한 적나라한 패권적 질서를 넘어서 어떤 것을 모색할 건가를 시사하고 있다고 봅니다.

사실은 오늘날 미국의 일국 패권주의라는 것은 근대사회가 이미 정해진 궤도로 달려온 것이라 생각해요. 근대사회는 바로 자본주의 사회인데 자본의 성격이 사회를 규정합니다. 자본은 자기 증식입니다. 더 많은 이윤을 획득하고 재투자해서 더 큰 자본으로 밟아나가는 것이 자본의 운동법칙입니다. 이것이 결과적으로 독점으로 나아가서는 대외팽창으로 패권으로 발전해 나가는 것입니다. 컬럼버스에서부터 이라크에 이르기까지 근대사회는 ‘동’의 논리가 관철된 사회입니다. 우리가 어떤 논리를 새로운 문화의 원리로 받아들여야 될 것인가, 그런 시사를 줄 수 있는 구절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현대 자본주의는 그것의 최후 단계, 최고 단계라고 생각합니다.

패권주의는 지속될 수 없다

패권적인 질서는 오래 지속될 수 없습니다. 묵자를 예로 들겠습니다.

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옛말에 이르기를 ‘군자는 물을 거울로 삼지 않고 사람을 거울로 삼는다’고 했다. 물을 거울로 삼으면 얼굴을 볼 수 있을 뿐이지만 사람을 거울로 삼으면 길흉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 전쟁이 이롭다고 하는 사람들은 어찌하여 지백과 부차의 일을 거울로 삼지 않는가? (사람을 거울로 삼으면) 전쟁이야말로 흉물임을 일찌감치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묵자>

묵자 예시문의 핵심은 ‘불경어수 이경어인(不鏡於水 而鏡於人)’입니다. 물에 비춰 보지 말고 사람에 비춰 봐라. 이것이 묵자의 주장입니다. 이것이 오늘날에는 대단히 윤리적인 의미로 보편적인 의미로 쓰이고 있습니다. 물을 거울로 삼던 시절 이야기인데 자기 얼굴만 보니깐 사람에다 비춰 보면 자기 품성이 보이잖아요. 묵자에게서는 이것이 반전평화론으로 나옵니다. 묵자는 철저한 반전평화론자입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침략받는 나라의 방어전에 참여해요. 또 침략국이 생기면 미리 가서 우리가 좋은 방어 기구를 만들었으니 침략이 실패할 것이라고 설득을 했어요. 나중에는 어느 방어전에서 전멸하게 되는데 이렇게 철저한 반전평화론자입니다.

불경어수라는 것은 역사적인 사례에 비춰 전쟁은 비참한 것이고 전승국도 반드시 망한다는 것이 묵자의 주장입니다. 묵자가 좋은 예를 들었는데 어느 약이 있는데 만사람에게 썼다, 그런데 서너 명만 효험을 보고 나머진 죽었다면 명약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해요. 전쟁방식이라는 것은 수많은 사람이 죽고 서너 개의 전승국만 남잖아요. 전승국만 보지 말고 수많은 비극적인 패전국의 비참함을 봐야 한다, 노자도 개선장군은 상례로써 맞이해야 한다고 했어요. 왜냐하면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들어오는 것이니까.

춘추전국시대의 전쟁방식, 부국강병책은 오늘날과 똑같습니다. 그것이 결국은 수많은 파괴, 조그마한 승리에 불과한 것이다. 이긴 서너 개 국가만 보더라도 진나라가 통일한지 십수년만에 망해요. 패권, 단 한 개의 ‘동’의 논리로 다른 것을 통합해서 자기의 존재성을 극대화 시킨 것은 최후의 형태라고 보는 것이지요.미국의 저력이 뭐냐 물으면 저는 ‘돈 찍어 내는 것’이라고 말해요. 이차대전 때 세계경제 규모하고 지금하고 차이가 많이 나잖아요. 그 많은 화폐를 미국이 다 찍어냈어요. 엄청난 기술, 교육 다 그 걸로 양성할 수 있어요. 그런데 오히려 그 많이 찍어낸 돈이 아킬레스 건이라고 볼 수 있어요. 이라크에 무리수를 두고 들어간 것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지금도 석유를 사려면 달러가 있어야 돼요. 산유국들은 석유 판 돈을 달러로 받아요. 그 달러 가지고 미국 증권, 채권, 상품을 사고 미국 경제를 떠받쳐 주고 있어요. 석유 결재 화폐가 달러가 아니고 EU화페로 바뀌면 달러 가치 순식간에 80% 폭락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입니다. 자기 존재성을 최대한 키우려는 것, 다른 것과의 관계성을 도외시하고 배타적인 존재성만을 키우려는 것, 이것은 최후의 존재형식이라고 보는 것이지요. 공룡이 생존 가능할 수 있는 몸의 크기가 있습니다, 바로 그런 점들이 패권주의라던가 존재론에 대한 반성이 필요하다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생각을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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