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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군 보안면에 사는 김영일(사진·79)씨는 한국전쟁 참전용사다. 그의 나이 열여섯이던 1948년 7월, 군산 제1사단 12연대에 자원입대했다. 경비대였다. 경비대는 군인이 되기 위한 초기 모임 형태를 가리킨다. 1남1녀 중 장남이었던 김씨는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나라를 지키는 길을 택했다. 모험이 필요한 나이였다.

자전거를 팔아 모은 돈이 가진 전부였다. 어리다는 이유로 처음에는 입대가 거절됐다. 하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 끈질긴 ‘구애’ 끝에 들어간 군대. 생각보다 훨씬 힘들었다. 미국에서 지원된 식량은 겨우 한 끼 때울 정도의 수준이었다. 미군이 입다 남은 군복은 그렇다 쳐도, 살을 에는 듯한 추위는 정말이지 견디기 힘들었다. 게다가 창설된 지 얼마 안 된 터라 지휘체계도 뒤죽박죽이었다. 혼란스러웠다.

1950년 6월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한다. 그의 나이 18세. 한창 친구들과 뛰어놀 나이에 생과 사를 오가는 생지옥에 놓여졌다. 서울이 3일 만에 함락된 절체절명의 시기였다. 12연대 대원들은 군산에서 낙동강까지 걸어서 갔다. 부대는 낙동강을 사수하라는 명령을 부여받았다. 누울 공간만 있다면 맨땅이든 산기슭이든 아무 데서나 잤다. 민간인들이 주는 보리밥으로 간신히 끼니를 때웠다.

밤이 싫었다. 인민군들은 주로 밤을 틈타 공격을 해왔다. 낮에는 국군 비행기가 엄호 사격을 해줘 전열을 유지할 수 있었으나 밤엔 속수무책이었다. 희생자는 주로 밤에 많이 나왔다. 그래서 마음 편히 제대로 잘 수도 없었다.

국지전이 계속됐다. 그 과정에서 친했던 동료가 경북 문경에서 전사하는 일이 발생했다.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두려웠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 했던가. 김씨에게 남은 건 이제 악과 깡 밖에 없었다. 

부대 내에 프락치도 있었다. 프락치는 이미 한국군은 승산이 없으므로 일본으로 도주하자고 꼬드겼다. 실제로 죽기 싫어 일본이나 다른 먼 곳으로 도망간 병사들도 많았다. 이들에겐 실종 또는 행방불명 딱지가 붙여졌다. 

맥아더의 인천 상륙으로 전세는 한국군으로 기울었다. 김씨가 속한 12연대는 그해 10월1일 38선을 넘어 평양으로 북진했다. 전의를 상실한 인민군들은 죄다 백기를 들어 항복을 표했다. 승리가 눈앞에 왔지만, 느닷없는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는 다시 역전됐다. 1951년 1.4후퇴가 시작됐다. 밀리고 계속 밀렸다. 그해 9월28일 서울은 다시 인민군에 의해 수복되고 만다.

금방 끝날 것 같던 전쟁이 계속되자 김씨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언제 적군의 총에 맞을지 모를 일이었다. 추위, 더위, 배고픔 그 모든 것과 싸워야 했다. 부대원들의 신경은 점점 날카로워졌다. 괴물과 싸우다 괴물이 되지 않을까 걱정됐다. 그깟 이념이 뭐다고, 같은 민족끼리 이렇게까지 싸워야 하나 회의감이 밀려왔다. 피는 더 큰 피를, 폭력은 더 큰 폭력을 낳았다. 하루빨리 전쟁이 끝났으면 하는 바람뿐이었다.

전쟁은 3년을 훌쩍 넘기고서야 끝이 났다. 53년 7월27일, 남한과 북한은 휴전을 선언했다. 김씨는 날아갈 듯이 기뻤다. 이젠 집에 갈 수 있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또 한 번의 ‘전쟁’이 김씨를 기다리고 있었다. 빨치산 토벌 작전. 1년 동안 계속됐다. 최후의 격전지는 변산이었다.

이후 김씨는 1962년 5월 상사로 전역했다. 제대 후에 쭉 서울에서 살다가 지난 98년 고향인 부안군 보안면으로 내려왔다. 부인인 송윤순(70)씨 사이에 3남이 있다. 3남 중 2명이 장교로 제대했다. 김씨는 한국전쟁 참전 공으로 국가로부터 무공훈장을 받았다. 김씨는 “한국전쟁과 같은 비극이 다시는 발생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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