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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옥화 씨
부안 국악협회 방옥화(사진·50) 이사의 고향은 강원도 화천이다. 향교 유림 행사, 춘계·추계 석전대제, 호벌치 추모제, 매창문화제 등 관내 큰 행사에 가면 그녀를 만날 수 있다. 

어렸을 때부터 노래 부르는 게 좋았다. 가수가 꿈이었다. 열창 후 보이는 관객들의 환호가 좋았다. 정식으로 무대에 서고 싶었고, 15살 무작정 서울로 향했다. 지난해 사망한 박춘석 작곡가 밑에서 노래를 배웠다. 잊지 못할 기억.

서울에서 현재의 남편을 만났다. 아들을 하나 낳았다. 세 식구는 화목했다. 1997년 느닷없이 IMF가 터졌다. 이는 곧바로 남편의 사업 실패로 이어졌다. 막막했다. 더 이상 서울에서는 희망이 없어 보였다. 부안에 있는 남편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동업을 하자는 제안이었다. 당시는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했다. 고민 끝에 생면부지 부안으로 향했다. 99년도 일이다.

처음엔 정말 힘들었다. 남편 친구 외에는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외로웠다. 선박 관련 사업 역시 초반에는 변변치 못했다. 난방비가 없어 겨울에 냉방에서 잔적도 있다.

사람들의 텃새도 심했다. 외지 사람에 대한 일종의 경계심이었다. 처음 5년 동안은 다시 서울로 돌아가고 싶었다. 방씨에게 부안은 낯설기만 했다.

어느 날 이대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 속으로 직접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변해야 했다. 우선, 좋아하는 일을 찾아야 했다. 노래 밖에 떠오르는 게 없었다. 여성회관에서 하는 노래교실에 가입했다. 하지만 연령대가 너무 높았다. 적응이 안 돼 3개월 만에 그만뒀다. 벽에 대고 혼자 노래 부르는 그 느낌이 싫었다. 비슷한 수준의 동료들이 필요했다.

부안 국악원이 눈에 들어왔다. 조심스레 문을 두드렸다. 물 만난 고기가 된 듯 했다. 가야금, 판소리, 민요, 검무 등 닥치는 대로 배웠다. 이제야 내가 할 일을 찾은 것 같았다. 방씨의 전공인 가야금 병창은 오당 김봉기 선생으로부터 전수 받았다. 과거 선비, 양반들이 불렀다는 전통정가에도 도전장을 내밀었다.

시작한 지 6개월 만에 각종 대회에서 상을 휩쓸었다. 2007년은 특히 상복이 터진 해였다. 김제 지평선 축제에서 ‘호남가’ 가야금 병창으로 대상을 차지했다. 청주시 시장상도 탔다. 경남 포항시에서 열렸던 대회에서도 대상을 수상했다. 이 한 해에 무려 5개의 상을 거머쥐었다.

처음에는 남편의 반대가 심했다. 자신의 부인이 밖에서 노래를 부른다는 게 탐탁지 않아서였다. 1년 간 많이 다퉜다. 하지만 지금은 가장 든든한 지원군으로 바뀌었다. 공연 있는 날이면 직접 차로 바래다주기도 한다.

경사는 또 있다. 안산에 있는 아들이 이번 가을에 결혼을 한다. 방씨를 닮아서 아들도 ‘무대체질’이다. 노래 역시 수준급이다. 가수 쪽으로 나가겠다는 아들을 가까스로 타일렀다. 결코 쉬운 길이 아니기 때문이다.

방씨는 요즘 무척 행복하다. 하루하루가 즐겁고 기쁘기만 하다.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바쁘다. 6월12일 전주대사습놀이 준비를 위해 매주 전주로 레슨을 받으러 다닌다. 대가가 되기 위해선 끊임없이 배워야 한다는 게 방씨의 생각이다. 하지만 배우면 배울수록 더욱더 어려워지는 게 국악 같다. 계속해서 빠져드는 이유다.

후학 양성이 궁극적인 목표이자 꿈이다. 숨어 있는 인재를 발굴해 키워내고 싶다.

더 이상 부안은 타향이 아니다. 서울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없다. 방씨에게 부안은 가수의 꿈을 실현시켜 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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