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 모험 보면 현실 고통 잊혀져

글을 쓰려고 하면 통신어, 이모티콘이 튀어 나오려고 한다. 작년에 잠깐 빠졌던 채팅이 안겨 준 선물이자, 인터넷이라는 거대한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한 발버둥의 결과이다. 물론, 채팅이 안겨 준 건 이것만이 아니다. 판타지 소설+채팅의 절묘한 조화는 나의 성격마저 놀랍게 변화시켜 놓았다.

초등학교 6학년 때에 도서관의 대출증을 손에 넣고 나서 판타지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도서관에 더 이상 재미있는 판타지 소설이 없게 되자 돈을 들여서 판타지 소설을 빌려보는 데까지 발전했다.

그 이전의 나는 거의 화분의 식물처럼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한 아이였다. 그런데 지금은 ‘미친 토끼’라는 불명예스런 별명을 얻었다. 워낙 판타스틱한 정신세계와 황당한 행동 탓에 얻은 별명이다. 이건 내게 긍정적인 변화다. 남들이 뭐라 하든.

마법, 자유, 모험... 이것들을 빼면 판타지 소설은 팥소 없는 찐빵이다. 마법이란 흥미로운 요소로 사람을 끌어들이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는 요즘 시대에 자유라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사람을 잡아 둔다. 판타지의 주인공들이 자유를 만끽하며 모험을 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현실의 고통과 씁쓸함을 잊게 하는 꿈속의 세상이다.

간혹 판타지를 ‘쓰레기’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진정한 판타지 소설을 읽어 보지 못했거나, 또는 읽어 봤어도 판타지 소설에 대해 편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사람들에게 ‘옥스타 칼니스의 아이들’이라는 소설을 읽어 보라고 말하고 싶다. 이 소설은 우리나라 최초의 ‘가상현실 온라인 게임’을 주제로 한 소설인데 지금의 ‘가상현실 온라인 게임’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작품성이 뛰어나다. 최고의 게임 소설, 스토리 전개 속도와 문체, 구성 등 모든 면에서 뛰어나다는 평을 받고 있지만 결말이 조금 씁쓸하다는 것 때문에 다시 읽기가 조금 꺼려지는 면도 있다. 물론, 이 소설보다 더 뛰어난 소설들은 정말 많다. 그러나, 판타지 마니아라면, 또는 판타지를 논하려면 ‘옥스타 칼니스의 아이들’ 정도는 읽어보고 논하였으면 좋겠다.

내가 전에 읽었던 소설 중에 ‘고양이’라는 소설이 있는데 그 소설에서 주인공의 친구가 마법에 걸려서 매일매일 어제의 자신과 싸우게 된다. 질 때도 있긴 했지만. 결국엔 어제의 나를 이기게 된다.

“오늘의 ‘나’는 내일의 ‘나’를 이길 수 없다”라는 내 좌우명이 만들어진 소설이다. 이런 내게 우리 선생님은 이런 조언을 덧붙였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 ‘판타지는 오아시스’라고. 그러나 ‘사막 없는 오아시스’는 오아시스가 아니라고. 그래서 올 한 해는 현실에 뿌리를 내려 볼까한다. 사막 없는 판타지 세상에 오아시스는 필요가 없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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