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 한창인 이라크 바그다드에 6월부터 정착해 평화운동을 벌이다 지난 달 28일 귀국한 이동화씨를 지난 3일 만나 현지 활동, 대사관 구금 및 귀국 경위, 이후 계획 등을 중심으로 얘기를 나눴다.

-전황이 계속 악화되고 있는데 이라크 현지에서는 주로 어떤 활동을 벌였나?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평화교육 활동이다. 뜻 있는 이라크인들과 함께 아동교육 구호단체인 ‘국경 없는 아이들’(Children Without Border)을 만들었고 특히 방사능 오염지로 알려진 알 투와이세의 빈민 지역에 대한 피해 조사를 벌이며 알 파탈 스쿨이라는 학교를 집중적으로 지원했다.
-현지 아동교육 실상은 어떠하며 아이들이 겪는 문제는 무엇인가?
-일단 미군의 공습으로 많은 학교들이 파괴된 상황이다. 어떤 경우에는 학교 운동장이 마을의 공동묘지로 변하기도 했다. 전쟁이 아이들 마저 미치게 만드는 것 같다. 특히 아이들이 별 생각 없이 총을 드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한국군의 아르빌 파병으로 반한 감정이 확산됐다고 하는데 활동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이미 작년 말 한국 정부의 추가 파병 방침 발표 이후부터 반감이 싹트기 시작했다. 3천명에 달하는 대규모급 전투병 파견이 반한 감정을 더욱 부추겼다. 특히 이라크인들이 가지고 있는 ‘한국은 미국 편’이라는 생각이 활동을 가장 어렵게 했다. 현지 동료들의 도움 없이는 활동하기가 매우 어렵다. 특히 8월 미군이 시아파 저항세력의 거점인 중부의 나자프와 바그다드 북동쪽 알 사드르에 대한 무차별 공격을 개시할 때는 안타까운 마음에 ‘인간방패’로 나서 공격을 조금이라도 막아 보려고 했다. 그러나 현지인들의 반감 때문에 접근 조차 어려웠다.

-바그다드 주재 한국 대사관에 들어가게 된 경위는?
-9월7일 오후 5시경 이탈리아 NGO 활동가 두 명이 납치됐다는 소식을 접했다. 비슷한 성격의 활동을 하던 분들이고 피랍 장소가 내 숙소인 바그다드 가라다 지역에서 약 200미터 가량 떨어진 곳이어서 신변 위협을 느끼던 차에 그날 밤 10시경 대사관에서 피신을 요구하는 전화가 왔다. 이 때 평화운동가 한상진씨가 먼저 들어가고 나는 대사관 요청을 거부했다. 그러나 이라크 동료들이 안전 지역으로 권유한 슐레마니아 지방으로 가기 위한 준비 시간이 필요하다는 판단에 9월 10일 대사관에 들어 갔다. 그리고 다음 날인 11일까지 외출에도 별 문제가 없었다.
-어떤 이유로 대사관측이 ‘구금’ 조치를 취했으며 어떻게 대응했는가?
-11일 밤 임홍재 대사가 해외 출장에서 돌아 온 후 상황이 급변했다. 대사관측은 애당초 피신 조건인 외부 활동 및 자유 출입 보장을 묵살하고 ‘외출과 활동 금지’ 방침을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이에 항의하며 준비 시간이라도 달라는 요구에 대사관은 ‘국익’과 ‘국민 보호’ 의무를 들먹이며 “대사관을 나가려면 국적 포기 각서를 쓰거나 한국으로 돌아가라”고 협박하다시피 했다. 이때부터 구금이 시작됐고 12일부터 한상진씨와 함께 항의단식에 들어갔다.

-그후 대사관을 나와 요르단 암만을 거쳐 귀국하게 된 과정은?
-14일 오후 담당 서기관이 면담을 통해 “당신들은 불법 체류자다. 만일 48시간내에 이라크를 떠나지 않으면 강제 추방 당할 수 있으며 그럴 경우 입국 비자 재발급은 불가능하다”고 엄포를 놓았다. 6월 입국 당시만해도 관련 법률 체계가 정비되지 않아 체류 비자 자체가 불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대사관이 8월 이후 발효됐지만 공식 통보도 되지 않은 비자 문제를 끄집어내 악용한 것이다. 하지만 재입국 불가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아 귀국을 결심했다.

-이후 활동 계획과 일정은?
-이라크 현지에서 벌이던 평화 배움터를 위한 준비 활동과 함께 네트워크를 만들려고 한다. 현지 정황을 계속 주시해야겠지만 반드시 재입국해서 다시 활동을 재개할 계획이다.

서복원 기자 bwsuh@ibu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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