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복 교수의 고전 함께 읽기 (상)

자본주의 체제의 물질낭비와 인간관계의 황폐화를 근본적으로 성찰하는 저서와 연구로 존경받고 있는 성공회대 신영복 교수의 강연회가 지난달 19일 전주에서 열렸다.

이번 초청 강연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의 저자로 널리 알려진 신영복 교수가 최근 ‘나의 동양고전 독법 강의’라는 책을 펴낸 후 갖는 첫 대중 강좌였다. ‘고전으로 보는 성찰과 전망’이라는 주제로 열린 이날 강연에는 전주교도소에서 수감 생활을 함께 했던 전북지역 장기수를 비롯해 일반 시민, 학생 등이 참여해 강연장을 가득 메웠다. 신영복 교수는 강연에 앞서 영국의 작은 시골마을 주민 8백여명이 소의 몸무게를 알아맞힌 짧은 우화를 소개하며 ‘함께 한다는 것’의 의미를 되새겼다. 신교수는 그의 글씨 ‘여럿이함께’에서도 밝혔듯이 “그 글씨 속에는 어디로 가자는 방법론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가치나 목표도 들어 있다. 바로 우리들의 민주적인 합의속에 있는 것처럼 ‘동양고전’에 대한 읽기도 여러분과 함께 읽어 갔으면 좋겠다”고 강연의 취지를 밝혔다.

본보 창간 준비과정에서 ‘부안독립신문’의 제호를 손수 써 준 신영복 선생의 이번 강연 내용을 독자들과 함께 읽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두 차례로 정리하여 싣는다.

<편집자주>




고전의 재조명이자 미래에 대한 모색

미래는 과거로부터 옵니다. ‘오래된 미래’의 의미는 노르베리 호지가 쓴 책의 제목입니다. 그런데 오래된 미래란 건 모순된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래된 미래보다 훨씬 더 모순된 어법이 ‘테러와의 전쟁’ 아닙니까. 미래란 우리들의 과거, 그 과거의 현재, 과거가 모인 현재로부터 미래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전으로부터 우리들이 어떠한 가치나 방향을 모색하는 것은 합당한 방식이라는 얘기입니다. 강물이 미래로부터 흘러온다는 생각은 종속사회의 의식구조입니다. 시간이 강물 같다면 과거로부터 흘러와서 현재를 거쳐서 현재를 사는 우리와 함께 미래로 간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미래로부터 거꾸로 현재를 거쳐서 과거로 간다는 것, 제3의 물결이 멀리서부터 우리 쪽으로 다가온다는 생각은 자주성이 결여된 사회의 의식구조의 보편적인 특징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우리들의 잘못된 의식을 반성하는 것, 그것이 저는 오래 읽어 온 고전에 주목하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내가 쓴 책이 우리들의 잘못된 생각, 방금처럼 변화가 바깥으로부터 온다는 잘못된 생각을 반성할 수 있는 작은 거울, 성찰의 거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고전독법의 관계론은 면벽명상의 결론

고전독법의 관점인 관계론은 면벽명상의 결론입니다. 5년간의 독거기간은 면벽명상을 통한 과거의 추체험(다른 사람의 체험을 자기의 체험으로 느낌) 시간이었습니다. 제가 독방에 있던 기간을 다 합하면 4~5년 정도됩니다. 독방에 있을 때 벽을 마주보고 앉아서 눈감고 면벽명상을 부지런히 했습니다. 제가 겪었던 옛날 일들부터 다시 생각하는 명상, 즉 과거의 추체험을 했습니다.아주 유년시절로 거슬러 올라가서 내가 겪었던 모든 일들, 내가 만났던 모든 사람들을 눈감고 앉아서 다시 생각하는 거죠. 그랬더니 참 놀라운 것을 발견하게 돼요. 대단히 오래 같이 있었던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자기 속에 별로 남아 있지 않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잠시 스치고 지나간 사람인데도 굉장한 영향력으로 자기 속에 남아 있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또 과거에는 아주 작은 사건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후에 내가 새로이 깨달았던 사회 역사적인 의식으로 보면 이것이야말로 해방조국의 대단한 문제를 나타내는 그런 일도 있습니다.

그중에 제가 재미있는 한 사람을 발견한 이야기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제가 중학교 1학년 때 1월1일 추운 겨울에 학교에서 신년 소집을 했어요. 왜 했는지 몰라요. 하여튼 학교 운동장에 집합해서 교장 선생님 신년사를 듣고 담임 선생님 따라서 들어 갔어요. 난로도 없는 교실에 쭉 앉아서 그 담임선생님이 1번부터 새해를 맞이하는 소감에 대해서 이야기하라고 하더라구요. 다들 지겨우니까 신부름 잘하고 숙제 잘하는 게 학생들 과제였어요. 중간쯤에 가서 한 친구가 일어서서 이야기했어요. 그 친구는 공부도 잘 못하고 집도 가난하고 학교에 왔는지 안왔는지 별로 눈에 안띄는 친구였는데 그 친구가 일어서서 이야기를 해요. 자기는 선생님이 1월1일이니까 무슨 소감을 이야기하라는데 잘 이해가 안된다고. 시간이라는 것은 이렇게 흘러가면 그만인데 여기가 1월 1일이라는 게 잘 납득이 안된다고. 그런 이야기를 떠듬떠듬해요. 우리 친구들이 조용해졌어요. 나도 깜짝 놀랐어요. 아, 저 이야기를 내가 할 껄.(청중 웃음) 제가 면벽명상을 통해 그 친구를 찾아냈어요. 제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란 책을 썼잖아요. 아마 조금이라도 사색적인 습관이 그후에 생겼다면 그 친구 때문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나의 정체성은 나의 사회성

저랑 같이 복역하던 사람 중에 ‘정대의(鄭大義)’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었어요. 이름이 참 좋죠. 큰 대자 옳을 의자니까. 그래서 이 친구를 볼 때마다 아마 아버님이나 할아버지가 이름을 지었을 텐데, 그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이 사람이 징역 사는 것을 알면 참 속상하시겠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었어요. 이름을 대의라고 지었는데 절도 전과가 두 개씩이나 있으니까, 그래서 제가 좀 친해진 다음에 이름 내력을 물어봤어요. 그러니까 이름 듣기 싫으니까 얘기하지 말라고 해요. 그래서 니가 이름값을 못해서 그렇지 이름이야 얼마나 좋으냐 그랬더니, 모르는 소리 하지 말래요. 자기는 돌이 채 안됐을 때 버려진 고아였대요. 이름 지어줄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없는 고아였대요. 그래서 이름은 어떻게 지어진 거냐고 했더니, 자기가 광주도청 앞에 있는 대의동 파출소 앞에 버려졌대요. 여러분들 우습죠? 저는 충격받았어요. 저는 그 젊은 사람의 파란만장한 삶을 모르고 살고 이름이라는 글자를 통해서 그 사람을 읽으려고 했다는 그런 창백한 관념성, 대단히 부끄러웠어요. 저는 교장선생님 아들로 태어나서 주로 교실에서 책을 통해서 사회를 얘기하고 생각을 키워왔다면 그러한 창백한 사고의 소유자라는 것을 부끄럽게 깨달았던 거죠. 그래서 감옥에서 자기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를 냉정하게 깨닫게 돼요.

나이 많은 목수 중에 집을 그리는 순서가 전혀 달랐던, 우리가 집 그릴 때는 지붕부터 그리는데 그분은 주춧돌부터 그리더라는 거죠. 주춧돌 그리고 기둥 세우고 마루 그리고 문짝에다가 젤 나중에 지붕을 그렸어요. 저는 지붕까지 다 그리기 전에 그게 집인지 몰랐어요. 그리고 나니까 집이네. 아 일하는 사람, 목수가 집 그리는 순서는 집을 짓는 순서하고 같구나. 책에서 이끌어내는 나는 지붕부터 그리는구나. 지붕부터 지을 수 있는 사람 있습니까.

그래서 자기 자신을 참 잘 알게 됐다는 깨달음을 갖게 돼요. 나의 정체성은 나의 사회성이라는 것이 명상의 결론입니다. 나는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배타적인 존재성으로서의 나라는 것은 없는 거다. 나라는 것은 내속에 들어와 있는 수많은 사건과 내가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의 총체, 그 사람들과의 관계성이 나의 정체성이 아닐까. 그것이 나의 결론입니다. 소위 말하는 관계론의 동기이고 배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기자신에 대한 철저한 이해 없이는 어떠한 실천도 어떠한 방향도 추구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현실, 우리 사회 기본 구조를 정확하게 알자는 것입니다.
세계의 근본구조는 ‘존재’가 아닌 ‘관계’

세계의 근본적 구조는 존재가 아니라 관계입니다. 물질의 궁극적 형식은 존재성이 아니라 관계성입니다. 물질은 확률과 가능성으로 존재합니다. 최근에 원자물리학을 전공하는 이론가들이 입증하고 있는 가설체계입니다. 물질이란 게 궁극적인 입자형식이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입자가 있는 게 아니라, 파동이기도 하고 입자이기도 하고 그런 어떤 구체적인 존재성이 아니라, 어떤 조건에도 존재할 수 있는 확률로 어떤 가능성으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배타적으로 다른 것과 구별되는 자기만의 존재, 이게 세계의 존재의 기본적인 형식이 아니라는 게 잠정적인 결론입니다. 세계의 궁극적인 원리는 존재론적인 것이 아니라 관계론적인 것이지요. 생명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생명은 외부와의 관계가 단절되면 존재할 수 없습니다. 외부로부터 어떤 에너지나 물질의 대사가 없으면 생명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부단히 외부와의 관련 속에서 적응해나가고 새롭게 변화해 나가고 이게 생명의 존재형식입니다. 관계가 없으면 생명도 없는 겁니다. 그래서 관계성이라는 것이 모든 것의 가장 보편적인 형식이고 우리가 지금 잘못 우리 머릿속에 담고 있는 존재성, 존재론적인 사고는 세계의 온당한 이해가 아닙니다.

관계는 아픔과 기쁨의 근원

관계는 아픔과 기쁨의 근원입니다. 우리들의 기쁨과 아픔은 대부분이 관계로부터 옵니다. 아마 여러분들 이런 절절한 경험들 가지고 있으리라 봅니다. 제 경우도 그렇습니다. 징역살이가 가장 힘든 게 뭐였냐는 질문을 받습니다. 춥고 배고프고 밖에 못 나가고 갇혀있고, 제 경우는 아니었어요. 나 때문에 마음 아파하는 사람들의 아픔이 나의 아픔으로 다시 돌아옵니다. 저랑 같이 징역살이 시작한 사람 중에 결혼 6개월만에 들어온 후배가 있어요. 이 후배가 어느날 감옥에서 어렵게 만나서 자기 아내가 아파서 이번 달에는 접견을 못 올 것 같대요. 그래서 “편지가 그렇게 왔냐?”고 물었더니 “편지는 안 왔지만…” 그래요. 그래서 어떻게 아냐고 물었더니, 집에서 양말, 손수건, 내의 등을 보낼 때는 자기가 쓰는 향수를 한 방울씩 떨어뜨려서 보낸대요. 그런데 이번에 보내온 소포에는 평소의 향수 양보다 두 배나 많이 뿌려졌대요. 두배 많다는 것은 자기가 아파서 가지 못하는 그 아픈 마음을 향수의 양으로 찐하게 표현했다는 거죠. 그게 그렇게 되나. 그런데 나중에 접견 왔더라는 거죠. 아프지도 않고. (좌중 웃음) 그래서 ‘그 사람 참 힘들게 살고 있구나’ 했습니다. 자기가 겪는 아픔보다는 바깥에서 아파하는 사람의 마음이 진짜 아픔이라는 것을 그때 한 번 더 깨달았어요. 기쁨이든 아픔이든 제 경우는 나 자신이 갖는 것 보다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오는 것, 그게 정말 힘든 게 아닌가 합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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