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릭! 이 사람

   
▲ 이총각 씨
한마을에 오래전부터 처녀, 총각이 살고 있었다. 이들은 수많은 세월이 흘렀어도 처녀총각인 채 남았다. 동진면 농원마을에 사는 장처녀(74)와 이총각(71)이 그 화제의 주인공.

서로 친구처럼 지내는 장처녀 할머니와 이총각 할머니는 고향까지도 같은 황해도 출신으로 피난민이다. 둘이는 6.25 전쟁 때 피난 나와 동진면에 정착하면서 평생을 이웃하며 살았다.

   
▲ 장처녀 씨
동네 사람들도 이들을 만나게 되면 “처녀총각끼리 잘 해봐라”며 농담 삼아 인사를 건네곤 했다. 남편들도 의형제처럼 친했고, 두 사람도 마을에서 오다가다 스치면 서로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황해도 옹진군이 고향인 장 처녀 할머니는 13세에 친정엄마와 언니랑 셋이서 피난을 왔다. 공산정권이 싫었던 마을 사람들과 함께 배를 타고서 백령도를 거쳐 피난민 집결지인 하서면에 안착했고, 스무 살 때 같은 피난민인 남편을 만나 이곳에 터를 잡았다.

고향을 떠올리자면 그 당시 학교라고는 폭격을 피해탄광촌의 땅굴에서 김일성 찬양 노래를 부르는 게 고작이었다. 장 할머니는 그게 너무나 싫었다며 지난날의 고생스러웠던 기억에 고개를 설레설레 흔든다.

“제2의 고향으로 5남매를 두고 손자까지 있는 지금이 행복하다”는 장 할머니는 다시 이북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단다.

그녀는 딸만 줄줄이 있는 산골 마을에서 아버지는 “에미나이들만 났는데 무슨 놈의 이름 지으러 가냐”고 말하자 자연스럽게 어머니가 지어준 이름으로 장처녀로 불리게 되었다.

혹여 장 할머니가 군청이나 보건소에 나타나면 사람들은 저마다 이름 좋다고 한마디씩 거든다. “죽어도 처녀네요”. 그러면 장 할머니는 “그래 나는 죽을 때까지 처녀다”라고 황해도 사투리 섞인 투박한 말투로 호탕하게 맞받아치며 웃어 제친다.

이총각 할머니도 이름 덕을 톡톡히 본 케이스다. 황해도 웅진면이 고향으로 3대 독자인 아버지가 붙여 준 이름이다. 기대했던 아들이 아닌 둘째딸이 태어나자 할아버지는 또 딸 났다고 서운해 하며 다음에는 꼭 남동생을 봐야 된다면서 총각이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이에 아버지는 홧김에 술 한 잔 마시고서 호적에다 덜컥 올려버렸다. 그런데 정말로 신기하게 바로 밑으로 남동생을 보았다.

이 할머니는 13살에 피난을 와서 19살에 같은 황해도 출신 남편과 결혼했다. 먹고 살기도 힘든 피난시절 입 하나 덜기위해 아버지는 그녀를 일찍 출가시켰고, 시집 안 간다고 생떼 쓰며 울었던 이 할머니는 어느덧 5남매를 출가시켰다.

어릴 적 아이들이 놀려댄 탓도 있었지만 그 이름이 싫다 해서 집에서는 한 때 순녀로 바꿔 부르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제는 총각이라는 이름이 더 정감이 가고 부르기도 재미있어 오히려 마음에 든다고 한다.

이 할머니의 이름으로 인한 에피소드는 끝이 없다. 농협이나 관공서에 가면 그녀의 특이한 이름을 기억하고서 “이총각님 오셨습니까”라며 그들이 먼저 반겨준다.

사람들은 이 할머니의 이름을 한 번만 들어도 잊지 않았고, 이름이 너무 좋아서 잘 살 거라는 덕담을 던졌다.

학교에서도 당연히 남편 이름이라고 여겼는데 아이들이 “우리 엄마다”라고 말하는 통에 선생님들이 배꼽 빠지게 한바탕 웃었다고 한다. 

남편은 “남 웃기는 이름이 얼마나 좋으냐”며 이름이 불릴 때마다 돈 받으라고 종종 우스게 소리로 말했다. 이젠 손자들도 할머니 집에 도착하면 “이총각 할머니 집이다” 하며 반갑게 소리치며 뛰어와 안긴다.

남쪽에 사는 북녀 장처녀와 이총각은 재미있고 특이한 이름 때문에 마을에서 인기스타다. 오늘도 같은 마을에서 소일거리를 찾아 바지런히 몸을 움직이며 오순도순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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