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 운전기사 백은기씨

   
 
격포항에서 배를 타고 한 50분쯤 가면 위도에 닿는다. 섬 모양이 고슴도치를 닮아서 그 이름도 위도(蝟島)다.

파장금 항에 들어서면 공용버스 한 대가 방문객을 맞이한다. 배에서 내린 관광객과 뭍에 다니러 갔던 주민들이 버스를 놓칠세라 분주히 올라탔다.

“다 탔는게라. 가고 싶은 섬, 머물고 싶은 섬, 환상의 섬 위도를 찾아주신 여러분께 봄 향기 그윽한 날 위도 향기 먼저 맡은 내가 보답하는 마음으로 모시게 되어 영광이구만이라”. “어, 오늘은 어찌 뽈금 아지매가 안 보이시네. 맨날 읍내에 침 맞으러 댕기더니 배 안 탔는게벼?”

섬의 유일한 버스 운전기사 백은기(61)씨는 위도에서 10대째 살고 있는 토박이이자 문화관광해설사다.

이윽고 버스가 항구를 출발했다. 섬 구석구석을 누비는 버스는 동네 유일의 대중교통수단이다. 해안도로를 따라 도는 버스는 가는 곳마다 절경으로 섬 하나하나 지날 때마다 백 씨의 감칠맛 나는 해설이 곁들여진다.

“저 섬이 악어 섬인디 악어가 바다로 기어 나가는 모양이지라. 지금 지나는 곳은 위도해수욕장인디 해수욕장에 오뉴월 해당화가 피면 그 유혹의 손길을 뿌리치질 몬해 가던 길을 도로 돌린다는 곳이랑게요” 그렇게 토속적이고 정감 있는 말씨로 손님들에게 입만 열었다하면 연신 위도 자랑이다.

그는 위도 절경 중에서도 쪽박금과 비석금의 풍경을 제일로 친다. 관광객도 미국 하와이를 뭐 하러 가냐며 이구동성으로 그의 말에 맞장구를 친다. 이곳을 지나칠 때면 백 씨는 위도출신 가수가 부르는 ‘위도를 아시나요’란 노래를 배경음악으로 쫙 깔아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켜 준다.

논금해수욕장을 지나 진리마을 어귀에 들어서자 버스가 속도를 줄이며 잠시 주춤거린다. 무슨 일인가 싶은 찰나, 갑자기 운전기사 백 씨가 버스를 멈추고서 “잠시 댕겨 오께라” 손님들의 허락도 없이 아예 내려버리는 게 아닌가. 궁금함을 이기지 못해 그의 모습을 눈으로 쫓았다.

도로가에 위치한 집 앞에서 그가 큰 소리로 부르자 한 아낙네가 문을 열고 삐죽이 모습을 들어내더니 백 씨의 손에 들러졌던 꾸러미가 그녀의 손에 건네졌다. 몸이 불편한 주민을 위해 손수 배달까지 해주는 정감 넘치는 모습이었다.

마을을 지나 한참을 달리는데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날 보시기요. 아예, 천천히 오시소” 우렁찬 목소리로 전화통화를 마친 백 씨는 버스 속도를 줄였다. 저 멀리서 한 할머니가 손사래를 치며 헐레벌떡 뛰어오고 있다. 버스는 잠시 멈추고 차분히 손님을 기다렸다. 버스를 탄 손님 중에 아무도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은 없었다. 위도에서만 볼 수 있는 광경으로 이곳 특유의 여유와 정서가 묻어났다.

위도는 인구 1500명이 사는 작은 섬이지만 아름다운 해수욕장과 곳곳마다 기암괴석을 이루고 있다. 1978년 전국민속예술제에 위도 띠뱃놀이를 올린 것도 바로 그였다.

젊어서 이장을 하던 그가 동네에서만 할 것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해보자는 의견을 꺼냈다. 그런데 춘천 전국민속예술제에서 덜컥 대통령상을 탔다. 그 후 위도 띠뱃놀이는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기에 이르렀다. 한때 전국적으로 조기파시가 섰을 만큼 풍성한 어장을 갖추었던 위도가 이제는 섬의 인구가 줄어들고 띠뱃놀이도 점점 간소하게 치러지는 추세에 백 씨의 마음은 씁쓸하다.

위도에 자리 잡은 역사가 깊은 만큼 그의 위도사랑의 뿌리는 깊고도 각별했다. 35년 전 아무도 섬을 거들떠보지 않을 때 위도해수욕장을 알리기 위해 부안 시내에 플래카드를 걸고, 홍보용 비디오를 뭍사람들에게 무료로 배포했다. 또한 영화 해안선을 위도에서 촬영하자 사유지를 아무 대가 없이 선뜻 내주었다.

백은기 씨는 섬마을 위도는 앞으로 관광지로써 거듭날 때 살아남을 수 있다고 믿는다. 새만금사업과 연계하여 전국의 사람들이 몰려들 수 있는 명소로 만드는 게 꿈이다. 그의 위도사랑이 절절이 배어난다.

“나를 보고 웃고, 아름다운 풍경을 보면서 웃어주면 행복하지라. 그래도 웃지 못하면 이빈후과 가야 한당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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