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나는 20대 청년시절 어느 동양학자가 쓴 ‘아름다움과 추함’이라는 제목의 철학적 수상집을 읽은 바 있다.

제목이 주는 분위기와 느낌과는 다른, 조금 무겁고 딱딱한 에세이집이었다.

책의 내용은 고대에서 중세, 근대, 현대에 이르는 동서양의 철학사조를 간략히 소개하면서 진정한 아름다움과 추함이 무엇인지를 화두로 던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책을 읽고 난 뒤에 남는 나의 의식은 ‘가장 추한 것이 가장 아름다운 것일 수 있다’는 어떤 역설적인 뚜렷함이었다.

그리고 그런 일이 있고 난 후 나는 현실적인 혼란을 겪었다. 현실세계를 바라보는 나의 의식의 바로미터가 장애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후 반세기가 지나도록, 그래서 나의 생활이 현실속에서 일반적인 굴곡으로 궤도화 될 때까지, 나는 현상과 진리라는 모순된 세계관과 늘 마주치며 싸웠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것은 젊은 시절의 일그러진 자화상일 수 있지만, 그 일그러짐을 아름답게 되새기는 것은 40대 후반의 또 다른 내 모습이다.

문학을 배운 나는 그 시절 정치와 경제, 법학 등 흔한 사회과학서적들에 염증을 느끼며 구토했지만, 조금은 다르고 불편하다라도 상대를 인정하는 의식의 방향과 손을 잡았다.

혹자는 이를 ‘전향’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겠지만, 진정한 공동체속에 몸을 두고 살아가기 위한 차선책이라고 말하고 싶다.

나는 요즘 부안의 현실을 바라보면서 아름다움과 추함의 가치를 다시 되 뇌여 본다.

자본과 노동, 문명과 생태, 찬핵과 반핵, 수구토착세력과 신흥시민세력이 맞서는 부안의 현실은 대부분의 국가와 지역이 그렇듯이 개인적으로 그리 희망적이지 못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문제의식의 해법은 작게는 역지사지의 마음가짐이나 크게는 전체공동체를 통일적으로 조망하는 관조에 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것과 함께 다른 사람과 또 다른 사람의 생각이, 그가 하는 일이 나와 다르더라도, 그래서 그것이 나를 위험에 빠트릴 정도로 불편하더라도, 거기에서 미적 가치를 이끌어 내는 여유로운 자유의지가 있다면, 나는 그것을 더욱 높게 평가하고 싶다.

그리고 행여나 많은 사람들의 혼과 의지가 이렇듯 공고화되고 연대된다면, 그래서 부안은 이제 갈등과 우려, 탄식의 장막이 모두 걷혔다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면, 나는 그 때 비로소 너무나 추한 것을 가장 아름답게 바라보는 내 의식의 비상을 다시 꿈꿔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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